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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보는관점의 차이 (요 12:12-19) 2023.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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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3-08-29 14:23:18 조회수 572
* 제목 : 예수님을 보는 관점의 차이
* 본문 : 요한복음 1212-19(요한복음 강해 33)
* 주제 : 예수님을 보는 관점이 바를 때 삶에 평화가 임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성민이었습니다.(7:6) 물론 이들은 택함을 받은 이유에서부터 오해 했는데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한 이유는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적기 때문이었습니다.(7:7) 하나님은 적은 무리를 선택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길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선택받은 것에 대한 자부심만 있었지, 선택에 대한 책임은 없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성민으로서 산다는 것은 그들을 선택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사이에는 적지 않은 관점의 차이가 존재했습니다. 사전적 의미에서 관점은 사물을 관찰하거나 고찰할 때, 그것을 바라보는 방향이나 생각하는 입장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특별하거나 대단한 존재여서가 아니라 작은 민족이 큰 민족 사이에서 어떻게 건재할 수 있는지를 보여줌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길 원하셨습니다.    그들을 돕는 자가 누구인지를 세상에 보이심으로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찾고 섬기도록 하려 했으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마음을 잊은 채, 자기들의 관점에서 하나님을 독차지하려 했습니다. 물론 그것조차 하나님을 바르게 섬긴 것이 아니라 자기들을 돕는 존재로 전락시켜 버렸습니다.
   오늘의 본문도 이스라엘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본문만을 보았을 때는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그분을 받아들이는 모습으로 보이나, 성경 전체를 살펴보게 된다면 이들의 행동 중심이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마리아가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은 사건이 있던 이튿날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향해 가셨습니다.(12)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이야기를 들은 백성들은 예수님을 마중 나왔습니다. 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나와 길에 깔며 예수님을 맞았습니다. 사실 종려나무에 관련된 절기는 초막절입니다.(23:34-40) 그래서 어떤 학자는 12절의 명절이 초막절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신구약 중간기를 걸치면서 헬라와 마카비의 전쟁이 후 종려나무 가지는 특별한 날에 국가적 상징으로 쓰였습니다. 성전의 재건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행렬 중에 종려나무 가지가 보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을 맞으며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호산나는 우리가 비옵나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을 호소한 것입니다. 이들은 이어 이스라엘의 왕(13)”이라 외치며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임을 고백했습니다. 이들은 그동안 있었던 예수님의 이적을 들었거나 보았을 것입니다.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하거나 듣지 못하는 자의 귀를 열어주시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신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정점을 찍으셨습니다나사로가 살아난 것을 보았던 사람들은 자기들이 보았던 것을 증언했습니다.(17-18)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셨습니다. 이 나귀는 다른 사람이 타지 않았던 순수한 나귀였습니다.(19:30) 전쟁에 승리한 왕이 당당하게 말을 타고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행진하듯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주님이라면 어린 나귀보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스가랴가 예언했듯이 겸손히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심으로써 성경을 이루셨습니다. 스가랴는 이스라엘의 왕이 이 땅에 평화를 선포하실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9:9-10) 제자들도 이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사 승천하셨을 때 비로써 이것이 성경에 기록된 내용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16) 아직 완전한 평화가 이 땅에 임하지 않았으며 이것은 종말론적인 내용이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분을 믿는 자들의 마음에는 참된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이 모습을 바라보는 바리새인들은 망연자실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여 이스라엘의 후환을 없애려던(11:49-50) 바리새인들은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인정하는 모습에 분노를 넘어 두려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떤 바리새인은 예수님께 백성들의 찬양을 멈추게 해 달라고 말했으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찬양하지 않는다면 돌들이 입을 벌려 찬양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9:39-40) 요한은 온 세상이 그를 따른다(19)”고 과장하여 적어 놓았으나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거듭나게 될 그의 백성을 생각하게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끝나나 우리는 결말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소망처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호산나를 외치던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다(27:23)”고 외쳤습니다. 불과 일주일이 못 되어 변해버린 이들은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관점에서 호산나를 외친 것입니다. 그들은 오직 이 땅의 평화를 생각했습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길 원했으며 이스라엘이 세계를 지배하게 될 그날을 꿈꿨습니다. 예수님은 전쟁을 이끌 왕이지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실 분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지금도 잘못된 관점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의 관심은 오직 이 땅에서의 평화입니다. 삶에 문제가 생기고 어려움이 발생한다면 예수님을 향해 원망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내가 그분을 선택하고 그분을 섬기는 것만큼 그분은 나에게 필요를 공급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분을 떠나기도 합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17:3) 여기서 안다는 것은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심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안는 것도 그분이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심과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자기의 목숨을 버리신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아는 것입니다. 이 내용의 중심은 나를 위해입니다. 육신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하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내용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그분을 위해 남은 삶을 드리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물질의 고통이 조금 있더라도 육체적 피곤이 조금 있더라도 때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섬겨야 하는 일들이 있더라고 그것이 어려움이 되지 않습니다. 특별히 불평이 나올 이유가 없습니다. 이미 나는 그분에게 충분한 은혜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구원자이십니다. 그분은 나의 주님이 되십니다. 그분에 대한 바른 관점을 통해 삶에 평화가 임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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